동문기고

동문기고

관악부로 맺은 인연!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2-07-20 14:59 조회108회 댓글0건

본문

ef43d7367e66a74e3116050ed17ba32c_1658296678_5955.png
양길웅 (제44회, 토목) 총동창회 제29대 회장 전주공고 관악동문회 회장

 

1958년 중학교 3학년 시절 고등학교 진로에 대해 고민하던 중 담임선생님의 권유와 부 모님의 승낙으로 전주공업고등학교 토목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입학 후 관악부에 입단하 여 중학시절에 전공한 관악 트럼본 연주자로서 방과 후는 물론 방학기간을 불문하고 합숙 훈련 등을 하면서 고광호 선생님의 지도로 혼신의 힘을 다해 연습에 매달렸다.

 

방학 합숙 훈련 때는 육·해군 군악대에서 현역복무중인 선배들이 휴가를 얻어 각 파트 별로 개별지도를 하였는데 때론 기합은 물론 사랑의 회초리로 거의 군악대 수준의 규율을 잡는 엄한 분위기 속에서 관악대회 우승을 위한 피나는 수련이 이어져갔다. 결국 제1회 KBS 개국 기념 전국대회에서 우승을 하는 등 전주공고 관악부의 명성은 날로 드높아져 갔다.

 

그 후 입대하여 육군본부 군악대로 배치되어 1965년 10월 1일 여의도 광장에서 국군의 날 행사를 마친 후 별도 8인조 밴드를 구성하여 당시 유명가수인 박재란, 한명숙, 성재희씨 등과 함께 1군사령부 산하 18개 사단 위문공연 투어 로 강원도 일대를 돌아다녔던 군악대원의 시절의 보람 있는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제대 후에는 잠시 이리상고 관악부 지도교사로 활동했었으나 장래의 안정적 직업을 위해 공학도로서 음악보다 전공인 토목분야로 마음을 굳히고 토목직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여 전라북도에서 1967년 10월에 시행한 토목직 공무원 공채 시험에 합격하여 이리시청과 전주시청에서 근무 하다가, 1980년 7월 1일 한국토지개발공사로 전직 하여 공학도로서 보람을 느끼고 전공인으로서 자긍심을 가졌던 직무중 하나를 소박한 마음으로 회고하면, 당시 전 주시의 최고 숙원사업인 철도이설을 박정희대통령 특별지시로 승인을 받으면서 조건사항 중 신축한 전주역광장에서 6지구 백제로와 같은 규모(L=620m, B=50m)로 연결하라는 조건을 이행하기 위하여 전주시에서 20만평 규 모로 동전주 택지개발 계획을 하여 추진하였지만, 전주시에서는 1980년 10월에 계획된 전국체전 준비와 철도이 설 비 부담 때문에 100억정도가 예상되는 택지개발을 할 수 없어 토지개발공사에 위탁하여 시행하는데 나에게 현 장감독 소장 임무가 주어져 3년 동안 어려운 곡절이 많았으나 기한 내에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하는 보람과 함 께 한국토지개발공사 분당신도시사업단 기술단장, 전북지사장, 군산국가공단 사업단장직을 끝으로 퇴직 후 설 계와 감리 전문회사에 몸담고 있는 동안 2006년에 제29대 전주공고 총동창회장까지 맡게 되었으니 돌고 돌아 다 시 꿈에도 잊지 못할 모교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그 후 전주공고 관악동문회 회장직을 맡아 삼성문화회관에서 개교 100주년기념 전주공고 관악동문 연주회 를 성대하게 치렀으니 전주공고 관악부와 맺은 나의 인연이 한순간 불꽃처럼 화사한 꽃으로 피어나는 듯 했다. 전공인 후배들에게! 후배들이여 현재 모교 각과의 운영 실태는 60년대와 비교하면 천지(天,地)차이로 현대화되었다.

 

나의 지난 세 월의 경험을 비춰볼 때 졸업 후 대학에 진학하여 더욱 깊은 진리를 탐구하는 것도 좋지만 충분한 학습시설을 보유 하고 학습을 지도하는 전주공고 출신들은 재학시절에 전문 과목을 열심히 하여 본인의 열정에 따라 사회생활에 어려움 없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본다. 편안한 직업만 택하면 성공할 수 없고 타인이 어려워하는 일을 할 수 있어야 성공한다는 배움에 철학을 알아야 한다. 학문을 많이 연구하는 것도 좋지만 공학도로서 자신의 목표를 뚜렷이 세워 나 자신을 지켜나 갈 수 있는 실 천의 의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명심하기를 기대한다. 나의 모교 전주공고를 영원히 사랑하련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